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담의 난 (문단 편집) == 여왕은 정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는가? ==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고, [[한국사]]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여군주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이루어진 일인데, 전례가 없는 일에 대해 반발도 심했을 것이다. 이미 진평왕 말년인 631년에 일어난 [[칠숙 석품의 난|이찬 칠숙, 아찬 석품의 모반]] 등이 구체적 예로 논급되어 왔다. [[삼국유사]] 등에서 계속 강조되는 여왕의 현명함 등은, 역으로 재위 내내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덕여왕과 그 근왕 세력의 노력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에도 적혀 있다. 다만 [[김부식]]은 개인적으로 선덕여왕의 즉위에 회의적이다 못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643년 [[태종(당)|당태종]]이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는 식의 발언에 '''"[[당나라]] 황실 종친을 보내어 신라 왕위에 오르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드립이 나오면서, 가뜩이나 여왕 즉위에 불편한 감정이 있을 신라의 중신들에게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백제]]·[[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으로 나라 사정도 뒤숭숭하니 말이다.[* 사실 [[의자왕]] 대에 [[당나라]]에 [[백제]]가 망했기에, 의자왕은 나라 말아먹은 병신이고 동시대 인물인 [[선덕여왕]]은 위대한 명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시 백제는 왕과 귀족 간 내부적 갈등이 있긴 했지만 [[무왕(백제)|무왕]] 시절부터 신라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신라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연히 당시 왕이던 선덕여왕에 대한 불만으로 번질 수 있었다.][* 당나라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 [[대야성 전투(642년)|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도 한 몫 했을 것 이다. 김품석이 그야말로 살려달라고 하다 죽고, 그의 반해 죽죽을 포함한 이들이 결사항전을 해버렸다. 김품석이 [[대야성]] 성주로 간 것은 그만큼 장인인 김춘추와 [[김해 김씨|같은 가문]]의 김유신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 인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치정 문제로 성이 함락되어버렸다. 거기에 싸우다 죽지도 않고 말이다. 당연히 신하들 입장에서는 선덕여왕의 무능함으로 비치기 쉬웠을 것 이다.] 그리고 645년 5월, [[태종(당)|당태종]]의 [[고구려]] 공략에 호응하여 병사를 동원했지만, [[백제]]에게 옆치기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당나라는 신라의 그런 도움을 받고도 고구려 정복에 실패했으니 결국 도와줘서 얻은 이득은 당장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 때 백제와 달리 당을 지원한 것이 신뢰도를 쌓아서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의 세 나라 가운데 신라를 최종 파트너로 삼는 중요한 명분과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때까지 당나라는 백제나 신라 중 어느 하나를 동맹으로 선택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이건 결과적인 이야기이고 당장에는 신라가 아무 이득이 없이 피해만 본 상황이었으니 귀족들은 불만을 가질 만 하다.] 이런 병크에 불만이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을 테고, 무엇보다 선덕여왕은 혼인은 한 적 있지만 후계자가 없었다. [[성골]]의 남자가 없어 여왕이 즉위하였는데, 같은 논리대로라면 '다음 왕도 여왕이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이 나올 만했다는 것. 사실 선덕여왕이 나이도 많고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데 딱히 태자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다음 왕은 진덕여왕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보돈 교수도 "[[선덕여왕]] 재위 중에 [[진덕여왕]]이 이미 다음 왕위 계승자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진골 귀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647년 정월 초 상대등 비담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터진 것이다. 선덕여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반란군에 피살된 게 아니라면[* 그리고 선덕여왕이 비담군에 피살되었다면 월성이 함락당했다는 말인데, 딱히 그런 기록도 없고, 선덕여왕은 당연히 김유신이 이끄는 근왕군의 제1순위 호위대상이었을텐데 김유신은 멀쩡하고 선덕여왕만 피살되는 상황을 상정하기 어렵다.] 이 무렵에는 여왕은 병을 깊게 앓았을 것이다. 급사했을 수도 있지만… 여왕이 중병에 들어 쓰러졌다면 반란을 일으키기엔 아주 적절한 시기다. 앞서 진덕이 다음 계승자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에 따라, 마찬가지로 [[주보돈]]은 "이 '여자가 해먹으면 안 된다'는 구호는 재위 16년차인 선덕여왕의 다음 계승자인 진덕을 겨낭한 것 같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일본 사신 타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玄理)가 646년 9월에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고 하고, 이에 화답해 김춘추가 647년 일본에 사신으로 넘어간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646년 겨울에 김춘추가 신라를 떠나있었고 비담의 난은 김춘추의 부재를 틈타서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담의 난과 관련된 사료에는 김유신의 역할만 강조될 뿐 김춘추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유신 본인도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압량주 군주였기 때문에 서라벌에는 없었던걸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본기와 김유신 열전이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신라본기에는 김유신이 644년 대장군으로 임명 되었다고 하나, 김유신 열전에서는 진덕여왕 2년까지 압량주 군주로 있었다고 나오기 때문. 그러나 어쨌든 압량주가 서라벌과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김유신이 비담의 난 소식을 듣자마자 서라벌로 달려왔을것으로 추측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